사랑의 기초 - 정이현 -
정이현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책을 통해서다.
몇 년 전이었을까,
나이 먹은 싱글녀의 삶이라는 게
대체 뭔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접한 그 책에서,
은수라는 여주인공의 회사 생활, 사랑,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훔쳐 보면서,
'여자 어른'이 무엇인가, 또 '여자 어른'의 삶의 무게는 얼마쯤 될까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잊고만 있던 정이현,
그녀의 소설책 두 권을 내리 접했다.
그 첫 번째 연애 소설 '사랑의 기초 : 연인들'.
요즘의 흔한 사랑 이야기인지라,
공감하는 부분도, 식상한 부분도 많았다.
한국소설에서 유연하고 미끈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느낌을 받은 건,
참 오랜만의 일이라 기뻤다. (아마, 백영옥 작가 이후,... 참 오랜만이었다.)
다만, '어떻게 사랑에 성공하는가?' 가 화두인 나에게는
뭐랄까 2% 부족했던 책.
그녀에게 결혼이란 '개인적인' 욕실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칫솔모가 한껏 벌어진 낡은 칫솔들이 식구 수대로 꽂혀 있는 공간,
치약 거품 튄 뿌연 거울이 걸려 있는 공간,
타인의 대변 찌꺼기가 말라붙은 변기에 앉아 생리대를 갈아야 하는 공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바닐라 향의 샴푸를 오로지 혼자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내킬 때면 언제나 거품 입욕제를 푼 욕조에 들어앉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상상을 할 때면 이상하게도 남편이라는 존재는 투명인간처럼 그 실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 집안에 피를 나누지 않은 두 명의 성인 여자가 공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일인지를 민아는 일찌감치 알았다. ...
그녀들의 공통점은,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일부로 곡해하고 있다고 믿는 거였다.
둘 다 자기의 솔직한 감정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한집에서 공동체의 운명으로 묶여 살아가야 한다는 자체만으로 힘에 겨우며,
그 힘겨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상대방과 저절로 거리를 둬버리게 된다는 진심 말이다.
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
급하게 몰아닥친 태풍은 어느 새 그쳤고, 그 후에는 폭풍우가 쓸고 간 해변을 서서히 수습해가야 한다. ...
민아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지금은 사귀고 있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람'으로 분류해 놓게 된 것은
자기방어를 위한 안전장치였다.
누군가 남자친구의 안부를 물어보면 그녀는 짐짓 쿨한 말투로 농담처럼 답하곤 했다.
"헤어지는 중이에요."
상대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면 민아도 따라 웃었지만 가슴이 서늘했다.
이 세계에서 기적은 종종 태연한 일상의 방식으로 구현되곤 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젊은 연인에게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일상,
그 틈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운명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일은 경이로운 놀이였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자신들이 마침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진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그들은 감격했다...
준호가 가만히 민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잡은 채 밤길을 걸었다.
누가 왼손이고 누가 오른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별은 높이 반짝이고 봄꽃들이 뿜오내는 향내는 아스라했다.
귓가에 종소리가 잘랑거리는 밤, 저 우주 만물 사이에 작동하는 오묘한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바치고 싶어지는 밤, 봄밤이었다.
그들의 사랑이 지금 고갈되어 가고 있다 해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비극적 파국에 이르렀다는 뜻도 아니다.
이곳은 보기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세계였다. ...
눈물은 오래지 않아 마를 것이고 그들은 머지 않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다시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청춘은 저물어갔다.
세상은 그것을 보편적인 연애라고 불렀다.
대개의 보편적 서사가 그러하듯이 단순하고 질서정연해서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여겨졌다.